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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의 세상보기] '국군포로였던 할아버지 고향으로' 패션디자이너 권봄 1.


[탈북민의 세상보기] '국군포로였던 할아버지 고향으로' 패션디자이너 권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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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의 손녀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차별받았던 한 탈북민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어렸을 때부터 패션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으로 탈북했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 패션디자이너 권봄 씨의 얘기 전해 드립니다.

국군포로의 손녀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차별받았던 한 탈북민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어렸을 때부터 패션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으로 탈북했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 패션디자이너 권봄 씨의 얘기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택배 현장음]

서울의 한 패션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탈북 패션디자이너 권봄 씨. 모두 퇴근한 늦은 저녁에도 권봄 씨는 홀로 남아 신제품 홍보와 마케팅에 관한 고민을 합니다. 이번 신제품은 메인 디자이너로서 처음 출시한 제품이라 더 신경 쓸 점이 많다고 하는데요. 권봄 씨는 북한에서부터 패션에 관한 관심이 아주 많았다고 하고요. 한국 드라마를 접하며 더 큰 관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녹취: 권봄 씨] “처음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패션을 따라 입고 싶다는 거에서 시작됐는데요. 근데 또 엄마의 영향이 되게 컸던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꾸미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셨었는데 옷을 사시면 꼭 신발까지 신고 거울 앞에서 보셔야 했었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꾸미는 거에 관심이 많았고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 제가 어릴 때 10대 때 ‘겨울연가’라든가 ‘천국의 계단’ 이런 드라마가 되게 유행했었는데 거기에서 나왔던 여주인공들 거의 매직한 긴 생머리였고 나팔바지라던가 그런 스타일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거기서(북한) 나팔바지는 못 입고요. 그리고 제가 학생이었으니까 단발로 잘라야 했었고 그런 것들이 달랐죠.”

권봄 씨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교복을 수선해서 입었고요. 그 당시 중국에서 들어오는 옷으로 더 다양한 패션을 즐겼다고 합니다.

[녹취: 권봄 씨] “제가 어릴 때는 중국이랑 거래가 많이 있었었거든요. 그래서 중국에서 넘어오는 옷들도 많았었고 중국에서 넘어온 옷 중에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있었는데 택(tag)만 잘라서 넘어오는 옷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사서 입을 수 있었고, 저희가 교복이 대량 생산으로 나오는데 사이즈(크기)는 별로 없고 기본 크게 나와요. 제가 학생 때는 이 키에 엄청나게 말라서 옷이 태가 안 나는 거예요. 너무 큰 옷을 입으니까 그래서 이렇게는 못 입겠다고 해서 원단 컬러도 되게 안 이뻐요. 네이비(남색) 색인데 죽어 있는 네이비(남색) 색 같은 거여서 원단을 제가 직접 사서 블랙(검은) 원단으로 사서 그거를 제 몸에 맞춰서 만들어서 입었었어요.”

검은색 원단을 사 직접 자기 교복을 만들어 입었는데요. 교복 디자인을 크게 변형하지 않는 한에서는 가능했다고 합니다.

[녹취: 권봄 씨] “저 때만 해도 교복에 대해서는 터치를 안 했고요. 그때 평양은 더했었어요. 평양 친구들은 제가 그때 평양의 축전 같은 데 갔었는데 평양 친구들은 아예 블루(파랑) 빛 나는 원단에 교복 치마도 엄청 짧게 입고 엄청 예쁘게, 근데 저는 그걸 보고 만들어서 입었던 거긴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건 터치를 안 했고 비판 무대에 서는 거는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 머리를 기르지 말라든가, 사복을 입지 말라든가, 레터링 있는 옷을 입지 말라는 규정이 있는데 그걸 어길 때 비판 무대에 서요. 근데 또 저희 때는 비판 무대가 많이 없어져서, 형식적으로 금요일마다 친구들의 장단점을 한마디씩 얘기하자, 이런 식이었어요. 그리고 저희 때는 애들이 많이 깨어 있다 보니까 단점도 마음 상하지 않게, 이 친구는 이런 게 좋은 것 같은데 이런 거는 보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렇게 엄격하지는 않았어요.”

패션을 좋아했던 권봄 씨를 이해해 준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북한 사회에서는 패션에 대한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출신 성분에 따른 차별도 받았죠.

[녹취: 권봄 씨] “학교에서는 머리 기르고 싶습니다, 이러면 선생님들이 안 돼, 이렇게 했을 때 저 그럼 학교 안 갑니다. 그러면 너만 머리 기르게 해줄 테니까 머리를 묶고 학교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식이었지만, 밖에서 걸릴 때는 청년 단체 그런 건물 같은 데 끌려가서 청소하거나, 근데 제가 거기서 이 나라에서는 정말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저희 아빠가 국군 포로병 가족이다 보니까 너무 안 좋은 집안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장사하시면서 사업하시면서 생계를 이끌어 가셨었는데 그쪽은 당 간부 자녀들이라든가 나라에서 뭔가 하시는 분들 자녀들은 옷을 그렇게 입어도 같이 잡혀 와도 보내줘요. 그리고 너희 아빠가 뭐 하니? 라고 했을 때 저희 아빠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이러면 저랑 아무것도 안 하는 친구만 남아서 청소하는 거예요. 그때는 사춘기다 보니까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옷을 못 입고 청소를 해야 하지?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봄 씨가 살았던 지역은 함경북도로 탈북이 북한에서 가장 흔한 지역이었습니다. 한 집 건너 한 명씩 탈북했다고 하고요. 브로커가 많아 어렵지 않게 탈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1년도에 탈북하고, 2012년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한국에 정착해서는 다시 고등학교 공부부터 시작했습니다.

[녹취: 권봄 씨] “제가 먼저 검정고시를 봤었고요. 검정고시를 보면서 패션이 하고 싶으니까, 홍익대에 가야겠다는 목표를 잡았는데 주변에서 다 말리는 거예요. 홍익대학교 학생들은 수능 1, 2등급의 학생들이고 어릴 때부터 입시 미술 해서 그림도 정말 잘 그리고 그런 친구들이 가서 졸업할 수 있고 또 패션 할 수 있다고 겁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공부를 다시 하려고, 홍익대학교 친구들이랑 같이 경쟁해서 이겨야 하니까 그래서 고등학교 과정을 밟고 거기에서 입시 학원까지 병행해서 그림을 그려서 홍익대학교 딱 하나만 지원했어요. 홍익대학교 아니면 나는 한강에 갈 거다, 이런 마음으로 홍익대학교 하나를 지원했는데 그래도 감사하게 모든 과정에서 통과돼서 입학하게 되었어요.”

기숙 대안학교에 입학해 대학 입시 준비를 한 끝에 드디어 2017년,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습니다. 수시로 합격했다고 하는데요.

[녹취: 권봄 씨] “미술 입시 공부는 너무 재밌었고요. 6시에 공부 마치고 7시부터 11시까지 그림을 그렸고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기숙사에 오면 12시였고 그게 매일 반복되는 과정이었는데, 근데 제가 되게 긍정적인 사람이에요. 너무 잘했는데? 난 천재야, 막 이런 사람이었고 그림을 그릴 때도 그리면서 나 왜 이렇게 잘 그리지? 항상 자신만만했어요. 객관적으로 누가 봤을 때 못하는 학생일 수도 있고, 못 그리는 학생일 수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입시 준비할 때 그림을 보면 너무 못 그렸거든요. 근데 그때는 만족했어요. 난 천재야, 난 피카소가 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저는 수시로 갔거든요. 내신도 보고 면접도 있고 실기 면접도 있어요. 그런데 실기 면접은 엄청 까다로웠는데 다른 분의 작품을 주면서, 저만의 방식으로 재디자인해 보라고 했던 시험이었는데 그거를 가지고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까지 해야 했어요. 제가 너무 자신만만한 사람이다 보니까 되게 자신만만하게 발표했고 자신만만하게 제출해서 교수님들한테 좋은 점수를 받지 않았나 싶어요.”

꿈에 그리던 홍익대학교에 입학한 권봄 씨. 자유롭게 패션에 대한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자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는데요. 동기들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녹취: 권봄 씨] “처음에 제가 되게 독특한 사람이다 보니까 친구들이 그냥 이 언니는 독특한 사람이구나, 되게 남다르다, 이렇게 생각했대요. 일단 제가 친해지면 4차원적인 사람이어서 생각하는 것도 4차원이고 뭐든 하는 것도 4차원이고 그때는 머리도 하얀 단발머리 하고 다니고 패션도 남달랐고 그러다 보니까 친구들이 그냥 저 언니는 독특한 사람, 근데 북한 사람이라고는 절대 생각을 못 했고요. 그래서 저도 얘기를 안 했고 친하게 지냈었고….”

또한 권봄 씨는 누구보다 패션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전공과목은 모두 A를 받았고요. 교수님들과의 인연은 졸업 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습니다.

[녹취: 권봄 씨] “공부할 때는 전공 수업에만 엄청 진심이었어요. 교수님한테 칭찬받으면 그 칭찬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행복감을 느끼고, 교수님의 안 좋은 질타라든가 그런 걸 들을 때면 진짜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이 밤새 자지 않고 이 작품의 문제점이 뭔지 계속 그거를 캐고 하다 보니까 그래도 졸업할 때는 전공과목은 다 전부 A로 졸업했고 지금도 교수님, 제가 회사에서 일하면서 뭔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전화해서 교수님한테 조언 구해서 만들거나 그렇게 하고 있어요.”

현재 권봄 씨는 서울의 한 중견기업의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데요.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일상복에 접목하고 있고요.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 자세한 얘기 다음 시간에 전해드립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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